벌써 한 시간 째 베란다에서 민준이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열 시가 넘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벌써 귀가했을 텐데, 내 아들은 유독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다. 전에는 말도 잘 듣고, 사내애답지 않게 애교도 부릴 줄 알았는데 재작년 남편과 이혼한 이후로는 말수도 줄고 신경질도 늘었다. 나는 뒤늦게 올해 열다섯 살인 민준이가 한창 사춘기를 겪을 나이라는 것과 이혼에 대한 민준이의 의견을 묻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큰 집에서 대화마저 하지 않으니, 집이 아니라 깊고 어두운 동굴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잦았다. 단지 입구에 들어서는 민준이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에야말로 민준이 손을 잡고 진득하게 대화를 해 보자 다짐했건만, 담배냄새가 밴 채로 현관에 들어선 아이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소리부터 지르게 된다.
“너 그렇게 엄마 속 썩일 거면 그냥 아빠처럼 나가버려!”
민준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쓱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린다. 나는 잠긴 방문을 두드리며 씩씩대다가,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엄마가 잘못했어. 이 한마디를 먼저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아침을 먹지 않겠다는 민준이와 승강이를 벌였다. 민준이는 끝내 아침밥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신발을 신기 시작했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자 민준이가 머쓱해졌는지 나를 돌아보며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현관문이 닫히고 곧이어 ‘딩동’ 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민준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엄마랑 같이, 여행, 다녀오지 않을래?”
아들 앞에서 말을 더듬는 엄마는 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민준이가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어주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애꿎은 청소기만 한참을 돌렸다.
며칠이 지나고, 민준이가 불쑥 동굴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동굴.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두운 것도 싫어하고, 좁은 곳도 싫어하고, 추운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민준이도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다시는 민준이와 여행을 갈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서울 가까운 데에 동굴 하나밖에 없어. 거기로 가자.”
민준이는 조금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로 십오 분. 맥이 빠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지만 두 식구가 된 이후로 처음 나서는 나들이였다. 번호표를 뽑고 입장 순서를 기다릴 때까지도 민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계속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걸 보니 동굴에 놀러 왔다는 걸 자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을 걸어 보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주제가 없었다.
사진을 좀 찍어 달라는 갑작스러운 민준이의 말에 나는 또 당황해버렸다. 민준이가 건넨 휴대 전화를 받아든 나는 ‘하나, 둘, 셋.’ 하는 것도 잊고 사진을 찍고 말았다. ‘미안해, 다시 찍을게.’라고 말하자 민준이가 뭐가 미안하냐고 묻는다. 그냥 다 미안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어느새 우리 입장 순서가 되어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늦여름이라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동굴 안은 놀라울 정도로 서늘했다. 민준이가 앞장서서 걷고, 나는 뒤따라 걸었다. 두 해가 지나며 키도 훌쩍 자라 내 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민준이는 뒤에서 보면 이제 아주 어른 같다. 돌부리가 계속 발에 채기도 하고 소름이 돋기 시작했기에 몸을 움츠린 채 걷고 있는데, 민준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건네주었다.
“추우면 말을 하지. 안 무서워?”
민준이가 내 옆에 와서 나란히 서며 농담처럼 한 마디를 건넸다. ‘당연히 무섭지. 나는 어두운 것도 싫어하고, 좁은 곳도 싫어하고, 추운 것도 싫어한다니까. 네가 이 나이 돼 봐라.’ 할 말은 많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민준이의 팔을 붙잡았다. 짜증을 내며 뿌리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민준이를 올려다보자 민준이가 슬쩍 웃는다. 왠지 민준이가 굳이 동굴로 오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긴 사춘기가 끝나고, 이제는 민준이가 내게 눈높이를 맞추어 줄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예전에는 금을 캤다던 동굴 안은 이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동굴 벽을 만져보며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동굴 영화관도 있고, 동굴 예술의 전당도 있고. 동굴이라고 해도 있을 건 다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지만, 일부만 개방되어 있어서 동굴 끝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민준이 옆에 서서 나는 함께 여행을 오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너는 이제 엄마가 밉니? 엄마를 미워하지 마. 엄마는 아직 너를 사랑해.’ 라고 말이다.
“가자, 엄마.”
민준이가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나는 민준이에게서 대답을 들은 것 같아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동굴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