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햄버거, 치킨 이런 거 자극적이고 식욕당기지. 거기에 적당한 알코올까지 더해지면 더 좋고.” 남자는 비꼬듯 이야기한다. 남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은 말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며 노여워했다.
“남의 새끼는 칼로리에 온갖 영양 다 계산해가면서 먹이고 정작 내 새끼는 피자, 햄버거, 자장면 이런 거나 먹이고. 이게 말이되? 어?”
남편은 그동안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아내의 얼굴을 향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간 지나온 일들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던진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여자와 남자는 맞벌이 부부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늘 병원 아니면 서제에 있었고 수술이 있을 때면 특히 더 예민하게 굴었다. 수술이 있고 늘 환자를 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누구보다 심할 것이라는 걸 아는 아내였기에 아내도 그동안 남편에게 잔소리 한번 심하게 하지 않았다.
아내는 학교에서 아이들 영양식단을 책임지는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내는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영양이 가득한 음식플랜을 짰다. 아내가 짠 음식대로 조리되어 나오는 음식들을 학생들은 남김없이 먹었다. 키가 크고 뼈가 튼튼해질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영양만점 식단이었기에.
끝내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남편은 아내가 울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아내를 달래줄 마음이 당시에는 조금도 들지 않아서 일 것이다.
식탁에는 이미 시킨 지 오래되어 퉁퉁 불어터진 자장면이 놓여있었고 자장면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아내는 식탁의 각각 모서리에서 뾰족한 모서리보다 더 뾰족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몇 달 전부터 학교급식의 안전과 영양실태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면서부터 아내는 더욱 꼼꼼하게 영양식단을 짜야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신경을 덜 쓰기 시작했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집에 갈 때 뭐 사갈까? 라고 한 말이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의례적으로 저녁은 할머니한테 먹고 싶은 거 시켜달라고 하라고 말하던 아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아내는 훌쩍였고 자장면 그릇을 가지러 온 배달부의 초인종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남편은 진료일정을 미루고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그러니 아내에게도 학교 일정을 조율하라고 말했다. 아내도 알겠다고 수긍했다.
그렇게 떠난 곳은 완주. 완주에 도착하니 와일드 푸드 체험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행이라 그런지 아이는 신이 났고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어보기도 하고 잠자리채로 곤충들을 채집하고 튀겨먹어 보기도 하며 모처럼 가족 같은 분위기를 냈다.
아내는 아이와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저녁상을 준비했다. 남편이 잡아온 물고기에 소면을 넣어 끓인 철렵국을 만들기로 했다.
‘아!’ 외마디 비명이 차마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하고 턱밑에서 머물렀다. 다행히 뜨거운 뚝배기 그릇을 들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벼운 국자가 아내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내는 얼마 전 손목이 시큰거리며 가끔 끊어질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정형외과를 찾은 적이 있다. 의사는 직업으로 인해 온 질병으로 진단을 했고 아내는 며칠 째 음식을 하는 것도 무거운 그릇을 드는 것도 벅차했었다.
남자는 떨어진 국자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순간 의사의 직감이었는지 아내에 대한 마음이었는지 아내의 손목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어. 의사 남편 두고도 써먹지도 못하냐, 바보같이.
내일 우리 병원에 와, 다시 검사받자.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국자는 내게 줘. 철렵국은 내가 끓이는 게 훨씬 맛있다고.”
“이렇게 나오니까 좋다. 공기도 좋고 이곳에서 나는 음식들로 바로 요리하고. 영양이고 식단이고 따로 짤 필요가 없네. 여기 내려와서 살까?”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마음이 불안하다. 내가 로버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3년 전. 로버트는 우리 학교의 교환학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나이기에 괜히 더듬더듬 말을 붙여 본 것이 인연이 깊어졌고, 우리는 어느 새 연인이 되었다.
창밖으로 로버트의 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서 환히 웃는다. 카페 안의 시선이 일순간 모두 나에게로 쏠리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로버트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로버트 또한 그렇다. 우리 둘만 행복하면 다 괜찮은 거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평생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나는 불안하다.
우리 둘은 아직 한 번도 다퉈 본 일이 없었다. 성격이 잘 맞아서이기도 하지만, 로버트가 상상 이상으로 나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들의 시선이다. 영국 남자와의 연애에서 결혼생활까지를 그리고 있는 웹툰이 큰 인기를 끈 이후로 젊은 사람들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 졌지만, 우리가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면 어르신들이 눈을 흘기며 혀를 차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정장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오늘 저녁에 로버트는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2년 넘게 사귀어 온 남자친구를 소개하겠노라 선언하고 집을 나왔는데, 그 남자친구가 미국인이라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혹시 거리의 사람들처럼, 우리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실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선택에 불만이 없다. 행복하게 살 자신도 있다. 로버트는 나와 결혼 한 후에도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지금 내 생활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가 이런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내가 눈 앞의 행복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이블에 놓인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고 입술만 물어뜯고 있자, 불안한 마음을 눈치 챈 듯 로버트가 내 손을 잡았다.
“걱정, 안 돼.”
‘그럼, 안 되지. 우리 둘은 잘 헤쳐가 갈 수 있을 거야.’하고 나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점심으로는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로버트가 좋은 생각이 났단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부대찌개 집이었다. 정장을 입고 부대찌개를 파는 식당에 올 줄은 몰랐는데, 로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세 좋게 이모를 부르며 부대찌개 2인분을 시킨다.
아직 한국어가 서툴지만, 그는 어디에 가서도 기가 죽지 않는다. 자라온 환경의 차이 탓일까. 나도 내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걱정이란 게 없어 보이는 로버트를 보면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찌개가 끓자 로버트가 내 앞의 접시를 가져가 찌개를 덜어 주었다. 그런데 내 몫의 접시에는 햄만 가득 담겨 있었다. 건너다보니 로버트의 접시에는 김치만 담겨 있다. 의아한 내 표정을 본 로버트가 웃었다.
“혜연은 햄을 좋아하고, 나는 김치를 좋아해. 그래서 나는 부대찌개가 맛있어.”
문득 한국 전쟁 이후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서 나온 햄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고추장이나 김치 등의 재료를 넣어 끓인 것이 부대찌개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버트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처음에는 김치는 물론이고 라면도 잘 먹지 못하던 로버트인데,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있다 보니 어느 새 김치 국물에 밥도 비벼 먹을 정도로 매운 맛에 익숙해졌다. 김치에 파를 얹어 먹는 모양새가 이제는 제법 한국인 같기도 했다.
“맛있을 거야, 앞으로도.”
오늘은 동호가 좋아하는 음악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특별히 음악실에서 수업을 하기 때문이지요. 동호는 특별히 음악수업을 좋아하였습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을 시작하셨지요. 교과서를 보니 오늘은 판소리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뜸 아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카세트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자 테이프에서는 예전에 들어본 적 있는 판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머리가 주뼛거리고 이상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수업이 지루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판소리보다 뮤지컬이나 오페라가 더 좋다고 삐죽거렸지요. 하지만 동호는 친구들의 의견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날 때까지 판소리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동호는 가방도 푸르기 전에 판소리에 대해 검색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오늘 수업시간에 들었던 신재효 선생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이 되고 동호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동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주변은 온통 상투를 튼 사람들과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한 고즈넉하게 자리한 초가집에서 낯익은 얼굴의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바로 동호가 오늘 공부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이었지요. 반가운 마음에 동호는 선생께 알은체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엮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이놈, 네가 나를 어찌 아느냐. 소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이냐.”
동호는 신이 나 신재효 선생 앞에서 그날 배운 판소리와 동호가 느낀 소리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재효 선생도 그런 동호가 기특했는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동호는 꿈속인지 아닌지 신재효 선생 뒤를 따라 다니며 직접 소리에 대한 진심을 배우고 우리 소리에 대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동호가 아는 단순한 판소리의 지식이 아니었지요.
따르릉 울리는 전화소리에 동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깬 동호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신재효 선생님을 만나 몇날 며칠 판소리를 배우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이니까요.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너무 생생하였던 동호는 당장 고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신재효 선생이 머물던 고택에 도착하였지요.
꿈에서 보던 초가집이 그대로 있고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 배우던 것들과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한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중 이상한 증표가 하나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호가 꿈속에서 몰래 남긴 흔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동호는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찡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지요. 그것은 음악수업시간에 판소리를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였습니다.
동호는 신재효 선생이 밟았던 길을 밟고 싶어졌습니다. 한참을 고택에 머물던 동호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기로 한 동호의 마음속에는 선생의 소리의 한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스러지는 노을이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학교 잔디밭 나무그늘 아래였다. 수업이 없는 시간이었는지 말간 하늘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의 아내는 정말 예뻤다.
조용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내가 옆에 앉은 줄도 모르고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품속의 전공책은 꼭 껴안고 있다. 건축학개론 책인 것을 보니 건축과 학생인 듯했다. 그녀 옆에 앉아서 흠, 하고 마른기침을 한 번 하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옆에 누군가 앉아있음을 눈치 채었다.
“아, 1학년이신가 봐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본 사람이 뜬금없이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니, 하늘만 계속 쳐다보고 계시 길래요 하늘에 뭐가 있나 해서.”
그제야 그녀는 경계를 풀더니 다시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 아까 나비가 한 마리 있었거든요. 굉장히 예쁜 나비였는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사라져버렸어요.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어요. 다시 올수도 있으니까……나비가요.”
그때의 아내는 나비를 기다린다고 했다. 긴 생머리가 찰랑일 때마다 옅은 비누냄새가 풍겼다. 그 비누냄새는 아내의 순수함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나비를 기다리는 어린 소녀의 이미지랄까.
나는 아내가 건축학과 1학년임을 눈치 채고 몇 학기나 건축과 교양수업을 들었다. 전공수업은 지각을 할 지언정 건축과 교양수업은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열심이었다. 그런 그녀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졸업을 하고 그 다음 해 우리는 곧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벌써 3년이 지났다. 집 앞 공원에서 달이 차오르는 저녁 바람을 만끽하며 앉아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바람이 살랑일 때 아내의 옅은 비누냄새가 풍겼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내는 여전히 예뻤다.
“무슨 생각해?”
“우리, 결혼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잖아. 그런데 왜 아이가 안 생길까. 당신 닮은 사내아이면 참 좋겠는데.”
“또 그 걱정이야? 우리 아직 젊잖아. 다른 사람들은 신혼 즐기려고 잠시 미루기도 한다는데 무슨 걱정이야. 병원에서도 특별히 이상 없다고 했잖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려고 하지마. 다 잘 될 거야.”
“그렇게 태평한 소리 할 때가 아니야. 솔직히 당신도 기다리고 있잖아. 어머니 아버님도 기다리시는 거 알아. 그리고 요즘 불임이 얼마나 많은데, 난 솔직히 걱정돼. 정말 많이.”
아내는 요즘 들어 부쩍 아이에 대한 불안감을 들어냈다. 병원에도 한 차례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이 소식이 없자 영영 아이를 가지지 못할까 염려스러워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것이 힘들었다. 아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나도 같이 힘들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힘들어 하는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아침부터 나를 깨우더니 전에 없던 호들갑까지 떨었다. 아내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여 눈도 채 못 뜬 채 아내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러던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자기야. 내가 오늘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아?”
돼지꿈이라도 꾸었기에 그러나, 생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내의 말을 기다렸다.
“나비! 나비가 꿈에 나왔어. 나랑 자기랑 나비축제에 간 거야. 그런데 많고 많은 나비 중에서도 아주 크고 예쁜 날개를 가진 나비가 우리 쪽으로 막 날아오는 거야. 그래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는데도 자꾸만 우리 쪽으로 따라오는 거 있지. 꿈에서 깨고 나서도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자기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울 정도였다니까.”
“나비? 그랬어? 난 또 돼지꿈이라도 꾼 줄 알았네.”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나비가 꿈에 나오면 태몽이라는 거 몰라? 우리한테 아이가 온 것 같다니까!”
“태몽? 정말이야?”
아내가 너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해서일까 정말 우리 둘을 똑 닮은 아이가 아내의 뱃속에 꿈틀하고 찾아온 것만 같았다. 서둘러 아내와 병원에 가봐야 했다.
그럼 정말 아름답고 예쁜 나비를 닮은 아이가 우리에게로 와 있을까?
한가로운 오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다. 언젠가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부모님께 호들갑을 떨며 알리고 친구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된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으나 막상 받아보니 조심스럽다. 일단은 책상서랍에 넣어둔다.
머리를 먼저 깎아야하나, 어떻게 기른 머리카락인데.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하건만 새삼 우리나라가 전시중임을 깨닫는다. 분단 그리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맘때 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괜스레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려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뭉클하다.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된다. 문득 옛날 강원도 철원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군부대가 많았던 곳. 차가운 바람이 서늘하게 감돌지만 따뜻했던 곳이 철원이다.
철원 땅을 밟았을 때 서늘하지만 맑은 바람을 스읍하고 마셔보았다. 상쾌하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조금 추웠을 날씨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나는 유원지에 놀러 가면 재미삼아 소총으로 인형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실제 총을 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다시 찾은 철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년 전 총성으로 가득했던 곳. 지금도 그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총성의 여운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물결이 번지는 곳이기도 하다.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를 시작으로 안보관광을 떠났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제2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를 서던 도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굴착 끝에 발견한 땅굴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 땅굴을 살펴보니 앞으로 군 생활을 미리 만나보는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철원 평화전망대였다. 남북의 그리운 석별의 정이 녹아있는 평화전망대는 북녘 땅의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며 철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토교저수지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들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고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왜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말할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민이라는 이유로 목숨 바쳐 훈련하고 전투를 하기 때문일까.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 올라타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 기차가 마지막으로 본 월정리역에 있던 기차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 이 기차가 서울행이 아닌 저 북쪽의 어딘 가라면.
힘찬 경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오롯이 기차의 움직임만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방향을 생각하니 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풀색의 비니를 벗고 머리를 매만져본다. 까끌까끌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식탁에 입영통지서를 올려놓았다.
기다리는 일은 항상 생각보다 더디게 다가온다. 출근길의 버스나 고기가 낚시 바늘을 잡아 무는 순간, 아내의 귀가나 유채꽃이 피는 시기 같은 것들 말이다. 재희의 성화에 오늘도 호수공원에 나왔지만, 내가 이곳에서 사랑하는 것은 유채꽃뿐이다.
“아빠! 나 저 쪽!”
아이는 말을 배우는 속도가 더뎠다. 아내의 부재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나는 중학교 졸업을 최종 학력으로 가진 막노동꾼이었다. 그날, 아내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빨간 가방을 멘 채 유채꽃밭에 서 있었고, 나는 공원을 재정비에 동원되어 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우리의 눈이 마주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썩어가던 더러운 하천이 말끔히 정비되어 아름다운 호수 공원으로 바뀐 그 해에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림을 차렸다. 나는 쓰러진 장모님 앞에서, 아내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불행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집 안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아내가 눈물을 흘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리라. 그러면 나는 아내에게 하얀 원피스를 선물하고, 아내와 나는 각자 아이의 오른손과 왼손을 잡고 유채꽃밭을 걸어야지. 아내는 장롱 안에서 빨간 가방을 꺼내 메고, 아이가 넘어지면 내게 주었던 노란 손수건으로 아이의 상처를 정성스레 닦아 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아빠, 나!”
재희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무심코 재희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고, 어린애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당황해 재희를 안아 일으키고 무릎이며 팔꿈치를 살펴보았다. 아이는 울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엄마 생각 해?”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아내는 재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돈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돈이 없어 차일피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다보니 어느 새 늦어버리고 말았다. 블라인드가 쳐진 병실이 아니라, 창문에 신문지를 붙여 둔 단칸방에서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다가 죽었다.
아마 아내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타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기어 다니기 시작할 나이였던 재희는 엄마가 끝내 놓치고 만 빈 젖병을 안고 잠들어 있었고, 내가 집에 들어오자 옹알이 소리로 웃으며 나를 불렀다. 그 때부터 나는 왠지 아이가 무서웠다.
“다친 데 없지? 아빠 왜 불렀어?”
재희가 안내문을 가리켰다. 읽어 달라는 모양이었다. 안내문에는 장자못 설화가 적혀 있었다. 며느리는 장독대 뚜껑을 덮지 않은 것이 기억나 뒤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단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유채꽃이 피려면 아직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장미정원에는 장미가 만개했다고 한다. 나는 재희를 안고 천천히 둘레길을 따라 장미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옛날 장자가 살던 자리에서 커다란 고기들이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물고기가 숨 쉰 자리에서 동심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재희가 내 옷깃을 꼭 잡고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심원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화초를 가꾸는 일을 그만두라 하였더니, 어머니는 꽤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이제 육십 대 후반 줄에 들어서신 어머니는 요즘 들어 허리며 어깨며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더운 날씨에 화단의 꽃들을 가꾸느라 몇 시간씩을 땡볕에서 보내시니, 옆에 붙어 있지도 못하는 딸자식은 답답할 따름이다. 봄이면 봄꽃 축제, 여름이면 장미 축제, 가을이면 가을꽃 축제, 겨울이면 눈꽃 축제가 열리는 이 꽃다운 곳에서 왜 굳이 어머니까지 직접 꽃을 키워야만 하는가.
집에 들를 때마다 이제 그만하시고 집에 가만히 좀 계시라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에, 이번엔 단단히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앉아,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싫어, 나는 나도 모르게 또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달이나 집에 들르지 못했던 나는, 어머니로부터 사진이 첨부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휴대전화를 사 드린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오타가 가득한 어머니의 문자는 여전했다. ‘언제’가 ‘ㅇ너제’, ‘엄마’가 ‘어마’로 표기된 문자와 몇 분 동안이나 씨름했지만, 도대체 전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엄마 참 여전하구나.”
나는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어머니가 보낸 흔들린 사진 속의 피사체가 대체 무엇인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당장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진 속에 꽃이라고는 단 한 송이도 없는 빈 화단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이게 뭐야? 꽃들 다 없애버린 거야? 누가 이렇게 다 없애버리라고 했어, 조금만 덜 고생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나는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목소리는 뜻밖에 밝았다.
“아이고, 얘. 그 귀한 것들을 없애기는 누가 없앴다고 그래? 네가 화초 키우지 말랬지, 어디 갖다 버리라고 했느냐?”
내게 보여줄 것들을 잔뜩 준비했다는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오랜만에 집으로 향하며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어머니는 마른 꽃을 인쇄하듯 한지에 박아 넣어 만든 공예품들을 하나둘씩 꺼내 보이셨다.
“이것 봐라. 꽃 가꾸는 것까지 그만두고는 집에 혼자 있기가 영 적적하고 해서 뭐라도 배워볼까 했더니, 이런 게 있지 뭐니. 이게 다 내가 요 앞에 있던 꽃으로 만든 거야. 신기하지 않어?”
꽃이 눌러 담긴 전등갓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아래로 꽃이 눌러 담긴 부채가 펼쳐졌다. 노란 백열전구 불빛에 비치는 줄기가 뻗은 모양새며 이파리의 맥들, 꽃잎들의 조화가 마치 그림 같았다.
“누른 꽃이라구 해서, 이걸 압화라고 한단다.”
“이걸 정말 엄마가 만들었단 말이야?”
내가 어머니의 압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어머니는 장롱 아래서 오래된 앨범을 하나 꺼내 펼치셨다. 앨범 속에는 화단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너도 어렸을 때에는 이 꽃 가꾸는 걸 참 좋아했는데 말이야. 인제는 나 혼자 꽃을 키운다는데도 그렇게 성을 낼 건 또 뭐니. 다들 떠나고 나 혼자 이 집에 있으려니까 꽃이라도 예전처럼 가꿔볼까 한 건데.”
어머니는 채송화에 코끝을 갖다 댄 열두어 살의 내 사진을 한참이나 쓸어 보셨다.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다시 원룸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머니는 미안해하는 내 표정이 영 어색하신지 금세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야아. 그래도 다 늙어서 혼자 화단 가꾸려니까 힘들기는 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가만히 눌러 담아 두기로 했지.”
나는 가방을 열고 책장을 펼쳤다. 어머니 몰래 눌러 담아 온 사진 한 장이 가로등 불빛에 가만히 반짝거렸다.
엄마는 시든 꽃처럼 좀체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임이라는 이름으로 등 떠밀려 퇴사를 하시고는 집에서 가사일 만하는 전업주부의 삶에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셨다. 나와 언니, 오빠는 이제 그만 집에서 쉬시라고 그만큼 자식들 뒷바라지 하며 사셨으면 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에 매진 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신다.
“자식들 뒷바라지 때문이 아니야. 니들은 니들이 알아서 사는 거고 나는 내 알아서 사는 거지. 자고로 사람은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럼 엄마 잘하는 그거 있잖아. 비즈공예랑 뜨개질. 그거 예쁘게 만들어서 저기 예술의 거리에서 가게 하나 얻어서 그거 파는 건 어때?”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홀로 우리 삼남매를 키워야 했다. 엄마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홀로 삼남매의 의식주와 교육까지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인생에서는 쉼표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뛰어야 했다. 아주 잠깐 쉰다고 하면 우리 오빠랑 언니가 고3 수험생일 때 밤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해서 같이 밤을 새며 뜨개질이랑 비즈공예를 하며 본의 아닌 취미를 만들어 나가신 것 빼고는 없었다. 사실 엄마의 인생에서 봄이 있었을 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참 힘들고 바쁘게 사셨다. 그런 엄마보고 이젠 좀 쉬시라고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어찌 지난 25년간의 삶의 패턴이 쉽게 바뀌기야 하겠느냐며. 그러던 중 언니는 나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엄마가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이용하여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우리 삼남매가 돈을 보태어 작은 공방 아닌 공방을 차려드리는 것이다.
“예술의 거리? 내가 뭐 예술가도 아니고 이건 그냥 취미라 누가 사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잘 될까?”
“그러니까 공방에서 아줌마들 모아서 만드는 법도 알려주면서 팔찌나 목걸이 뭐 그런 거 파는 거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꽤 잘 되던데? 엄마 실력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 트렌드가 요런 복고거든. 그래서 딱 좋은 것 같은데?”엄마는 이렇게 나누는 말 뿐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생기를 되찾으신 듯 했다.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진취적인 결정으로 일을 밀어붙일 때이다. 엄마는 약 일주일간 이곳저곳을 알아보시며 신중히 고민을 하신 끝에 우리 삼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예술의 거리에 10평 남짓한 공간에 세를 받아 가게를 차렸다. 작은 평수임에도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꾸며 놓으니 제법 괜찮아보였다. 옆에는 작은 소극장들이 있어서 공연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구경하며 몇 개씩 구입하기도 하여 목도 괜찮았다.
한 4개월 쯤 되니 차차 단고로 생기고 옆 가게 아주머니들과도 친목을 쌓았다. 엄마는 완전히 만개한 꽃처럼 생기를 되찾으셨다.
“어서오세요. 아, 정선생님 오셨어요?”
엄마가 정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엄마 가게 앞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시는 늦깎이 남자 배우이시다. 정선생님도 회사 정년퇴임을 하시고는 소싯적 꿈을 펼치시고자 공연장에서 배우로 활동하게 되셨다고 했다. 마침 공연장에서는 노년의 삶에 대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당히 오디션도 합격한 엄연한 배우이시라며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정선생님께서는 공연 준비 한 두 시간 전에 엄마 가게에 놀러 오신다고 했다. 두 분은 가끔 차를 마시며 담소도 나누시며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았다. 나와 언니도 엄마 가게에서 정선생님을 한 번 뵌적이 있었는데 중후한 외모에 인품도 좋은 신 것 같고 무엇보다 정선생님도 몇 해 전에 아내와 사별하여 혼자라고 하셨기에 슬쩍 엄마에게 잘해보라는 말을 건넨적이 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아, 박여사님. 저기, 오늘 혹시 시간되시면 제 공연 보러 오시지 않을래요? 오늘이 제가 주인공으로 서는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아서요.”
“아, 그러세요? 그렇담 가야지요. 8시 반 공연이라고 하셨나요?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엄마는 8시에 근처 꽃가게로 가셨다. 아마 정선생님께 드릴 꽃다발을 사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밝게 웃으셨고 왠지 엄마에게 여러모로 두 번째 봄이 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