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생 여자가 티켓의 자리표를 보며 서성인다. 열차 안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건 아니었음에도 여자는 쉽게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왔다. 86년생 여자이다. 둘은 한 지점에서 만났다. 이 여자의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춘천까지 함께 앉아 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둘은 서로를 탐색했고 왠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두 정거장쯤 지난 후였을까 젊고 앳된 모습의 90년생 여자가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이 셋은 마주 보며 앉게 되었다.
우연일까. 세 여자 모두 홀로 춘천으로 떠나는 모양이었다. 79년생 여자는 책을 들고 있었고 86년생 여자는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다. 90년생 여자는 스마트폰으로 연신 메시지를 날렸지만 셋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심 신경이 쓰인 79년생 여자가 연장자답게 먼저 말을 꺼냈다.
“춘천까지 가시나 봐요?”
79년생 여자가 입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여자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다시 어색함이 짙은 안개만큼이나 무겁게 깔렸으나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한번 말을 붙여봐서일까 그 다음부터의 질문은 어렵지가 않았다. 세 여자는 각자 통성명을 하고 춘천으로 떠나는 여행에 대해 질문을 했다. 왜 혼자인지. 다른 사람이 홀로 떠나는 여행에 대해 세 여자는 나름의 추측을 던졌다. 실연을 당했나? 각오를 다지기 위해 떠나는 건가? 각자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세 여자의 대답은 같았다.
‘젊었을 때 언제 한번 혼자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어요.’
언젠가부터 춘천으로의 여행은 청춘 그리고 낭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지정한 것이 아님에도 세 여자의 머릿속엔 춘천 이코르 청춘이었다.
이번엔 가장 젊은 90년생 여자가 입을 떼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1박 2일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을 계획한 그들에게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이었음에도 거절하기가 미안해서였는지 그녀들은 쉽게 수락을 했다.
여행이 주는 맛이 이런 것일까? 생판 남이었던 사람과의 1박 2일의 여행이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사람과의 여행처럼 편안했다. 이곳이 춘천이어서 그런 것인지 세 여자의 취향이 우연히 맞아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셋은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
셋은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숙소로 돌아왔다. 반나절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서 그럴까 세 여자는 조금 센티멘털해졌다. 왠지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86년생 여자가 오늘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면서 말했다.
“사실 난 내가 정말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늘 가던 편의점만 가고 늘 만나던 사람만 만나왔었으니까.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밥 먹고 차 마시고 웃고 떠들고. 놀라운 하루야.”
가만히 듣고 있던 79년생 여자도 거들었다.
“그러게. 사실 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마음 추스르려고 온 여행이었어.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거든. 그리고는 다시는 결혼 같은 거 안 한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무작정 짐을 싸서 나오긴 했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 외롭기도 했고. 이제 다시는 누군가를 만날 수 없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것도 아닌가 봐. 이렇게 우리 셋이 있는 걸 보면.”
79년생 여자는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파혼이야기까지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아무렴 어떤가. 왜 그런 이야기까지 내게 하느냐고 부담스러워하는 이도 없었고 안쓰럽거나 가여워하지도 않는 둘이었으니까 괜찮았다.
세 여자가 오늘의 여행을 뒤로하고 지속적인 연락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 여자는 말없이 서로의 등을 토닥였고 그 토닥임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녀들만 알 수 있었다.
옛날 옛적에 청도에는 아주 힘이 센 소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들은 항상 서로의 힘을 자랑하려고 다투기 일쑤였죠. 소의 뿔이 맞닿을 때마다 하늘과 땅이 흔들렸습니다. 청도에 사는 동물들과 식물들은 늘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투는 두 마리 소 때문에 하늘과 땅이 흔들리니 식물들은 땅에 뿌리 내릴 수 없었고, 동물들은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금세 풀들은 시들어 버리고 동물들은 서로를 힐난하고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도 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힘이 비등하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어요. 뿔을 더욱 곤두세워지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힘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늘과 땅은 날이 갈수록 거세게 흔들렸죠.
결국 참다못해 적중산 중턱에 사는 지혜로운 감나무가 나섰습니다. 천년을 살았다는 이 나무는 청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황소들이라지만 감나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죠. 감나무는 소들을 적중산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고는 너희들 중에 저 하늘의 별을 떨어뜨린다면 자신이 아끼는 감 하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별을 떨어뜨리기 전에는 둘이서 싸우면 안 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소들은 입맛을 다셨습니다. 감나무가 품은 감을 먹으면 힘이 더욱 세어지고 온몸에서는 아름다운 색동빛을 뿜게 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죠. 또한 청도 감나무의 감은 반시라고 불리며, 그 육질이 굉장히 연하고 너무나 달콤해 한번 맛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두 마리의 소는 서로가 아닌 하늘의 별을 떨어뜨리기 위해 열심히 하늘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떨어뜨리려고 해도 별들에게 그들의 뿔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다투지 않고 머리를 맞댄 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했던 황소 한 마리가 산을 향해 뿔을 내다박았습니다. 그러자 뿔이 조금 부스러지더니 반짝이는 빛으로 흩어졌습니다. 밤에 흩날리는 빛은 마치 별들처럼 보였습니다. 어리석은 소는 그게 별인줄 알았습니다. 소는 감나무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만든 빛을 보여줬습니다. 그러자 감나무는 감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산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들의 뿔은 조금씩 닳기 시작했고,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보였습니다. 별을 가져올 때마다 감나무는 감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소들은 자신들의 뿔이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별을 만들어 달콤한 반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황소들의 뿔이 점점 닳자 하늘과 땅을 흔드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적중산에는 커다란 구멍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중산 중턱에는 아주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습니다. 그러자 소들은 서로의 뿔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들의 뿔은 점점 더 빨리 닳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날렵하게 크던 뿔은 아주 작아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들이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하늘과 땅이 울리지 않았어요. 청도는 평화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소들은 멈추지 않고 별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뿔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지금도 소들은 별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뿔을 맞대고 있답니다. 사람들은 소들이 만들던 별들을 기리기 위해 빛 축제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몸이 무거웠다. 간밤에 누군가에게 솜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삭신이 쑤셨다. 의도하지 않은 무거운 신음이 입 밖으로 슬며시 흘러나왔다. 겨우 팔과 다리를 뻗어 자다 깬 그대로 기지개를 켰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현기증이 났다. 한번 휘청거리며 선반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는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빛 때문에 다시금 현기증이 났다.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앉았는데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공지사항. 어제 연락드린 외국인을 위한 맞춤 프로그램에 대한 문서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클라이언트는 도무지 주말과 휴일의 개념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회사에 나오라는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자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라는 것 자체가 일의 연장선임을 진정 모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시고 메일을 확인해보려는데 입사동기 성연의 전화가 왔다.
“어, 성연씨. 무슨 일이야?”
“어! 웬일이야. 매번 여보세요 하고 딱딱하게 받더니. 다른 게 아니고 메일 받았냐고.”
“응, 지금 열어보려던 참이야. 뭐 급한 거야? 이렇게 전화를 다 주고.”
“급한 거라기보단 외국인 협업 프로젝트라나 그런 건데 자기랑 나랑 하게 되었더라고. 그래서 연락해봤어. 무슨 주말이 이러냐. 아무튼 메일 확인하고 시간 잡아서 기획 좀 짜보자고.”
이렇게 정신없는 아침도 없을 거라며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떠보니 클라이언트가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내용인즉슨 관광을 통한 지역의 문화 익히기라는 주제의 행사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리 기획만 탄탄히 짜면 그리 어렵지 않은 프로젝트였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프로젝트 담당자가 자신과 성연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민주와 입사동기인 성연은 늘 비슷한 업무를 맡았기에 항상 비교, 평가의 대상이었다. 물론 민주의 자격지심이라면 자격지심이었겠지만 민주는 이번 프로젝트 담당이 외국인인 것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성연은 화려한 어학연수 스펙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주는 비행기라고 타본 것은 제주도를 갔다 온 것뿐이었다. 민주는 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성연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전화한 것이 참 얄미웠다.
민주와 성연은 각자 관광 지역을 선정하고 지역의 문화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민주는 강진청자를 떠올렸다. 우연히 들렀던 강진에서 외국인들의 청자 만들어보기 체험을 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진청자 만들기 체험? 무슨 애들도 아니고. 외국인들이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아니야. 이게 뭐니?”
참. 말 한마디도 얄밉다. 청자 만들기 체험이 무슨 어린이들만 해야 하는 대표 프로그램도 아닌데 저렇게 길길이 날뛴다.
그렇게 두 파트로 나누어 각각 10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자신이 기획한 일정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민주는 말이 좀 어색했지만 그만큼 외국인들의 말을 들으려 노력했고 더 세심한 준비를 했다.
흙을 만져본 느낌, 청자에 대한 첫 생각 등을 참 편안하게 나누었다. 그리고는 각자가 만든 도자기에 자신이 새기고 싶은 문구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새기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외국인들은 흥미로워했고 꽤 진지하게 문구를 생각했다.
프러포즈 내용을 쓰기도 하고 자신의 다짐을 쓰기도 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외국인 한명 한명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을까 진심어린 걱정이 되었다. 고맙게도 외국인들은 이번 체험에 만족했고 즐거운 추억을 안고 돌아간다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마쳤다.
그날 아침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도 산뜻했고 햇볕도 그다지 따갑지 않았다.
‘택배요’
택배? 주문한 게 없는데.
손에 안겨진 것은 다름 아닌 서툰 글씨가 새겨진 청자였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정말이지 추억은 국경을 넘어선다.
“당신, 그것 좀 내려놓을 수 없어요?”
한 달 전,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쉬게 되신 아버지는 저녁을 먹자마자 또 통기타를 잡으셨다. 퇴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등에 난데없이 업혀 있던 바로 그 기타다.
“기억 안 나? 내가 왕년엔 기타로 아주 날렸잖어, 민정이 엄마!”
“그건 왕년 얘기고!”
어머니의 반격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예전엔 아주 잘 치셨다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기타를 연주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솜씨는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타를 잡았다는 사실이 마냥 좋으신 모양이었다. 내게 부탁하셔서 MP3에 가곡들을 잔뜩 다운로드 받으신 것은 물론이고, 7080 콘서트 프로그램 시간을 미리 적어두었다가 꼬박꼬박 챙겨보시기도 하셨다.
“어휴, 얘. 난 네 아빠 기타 소리 때문에 죽겠어, 아주.”
말씀은 항상 그렇게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타 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셨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상징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모습, 바로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장발을 한 채로 잔디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문학소녀였던 어머니는 소설처럼 아버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매일 먼 발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존재를 눈치 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셨다고 했다.
“왜, 낭만적이고 좋은데.”
“다 늙어가지고 낭만은 무슨. 예전처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저걸 듣고 있자니 고역이다, 야. 저 양반,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도 까먹은 건 아닌지 몰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독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맞는 부모님의 기념일인 만큼, 올해는 꼭 내 손으로 챙겨드리고자 다짐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여보, 민정이 엄마. 이리 좀 와 봐. 티비에 지금 누군 나오는지 알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듯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셨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정겨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가 보시면 다 알아요.”
저녁 식사 때 자르실 요량으로 아버지께서 사 오신 케이크를 그대로 조수석에 싣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미사리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 라이브 카페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 나 어제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꽤나 유명한 곳인데다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서두른다는 것이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기에, 조정 경기장에 차를 세웠다. 운이 좋으면 모터보트 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시간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잔디밭과 꽃나무로 꾸며진 경정공원과 산책로, 솟대가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 예약된 카페의 전화번호와 약도를 건네 드렸다. 어머니는 초대 가수의 이름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네 아버지 알면 아마 여기서 춤을 추실 거다.”
“그럼, 방해꾼은 이만 빠질게요. 한 삼십 분 있다가 이 길 따라서 쭉 걸어가시면 돼요.”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카페 앞으로 두 분을 모시러 갈 것을 약속한 나는 혼자 자전거를 빌렸다. 공도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갔다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종종 팔짱을 꼭 끼고 걷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 가사처럼, 추억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높이 올려다보려니 핑하고 현기증이 났다. 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다. 지수는 선배가 소개해 준 도자공방을 찾는 중이었다. 공방 이름과 간단한 약도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한번 더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은행나무에 손을 짚고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었다. 여기가 아닌가 싶을 때 지수의 눈에 들어온 자그마한 공방 하나.
지수는 회사에서 맡게 된 ‘우리 고장 바로 알기’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지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도자기라니 말만 들어도 지루하고 따분했다. 지수는 학창시절 여학생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한 십자수니 비즈공예니 하는 것들에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또각거리는 신발을 다시 한 번 고쳐 신은 지수는 자그마한 공방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널찍한 실내에는 갖가지 도자기와 사기그릇, 앙증맞은 실내 인테리어 장식품까지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거리자 상냥하고 단정해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어서 오라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자기 만드는 법 좀 배우러 왔다며 용건을 말했다. 지수의 급한 성격이 여기에서 나왔다. 여자는 친절히 지수를 안내했다.
지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흙을 만졌다. 반죽된 흙을 쓰다듬듯이 만지는 지수를 보고 여자는 주물러 보라고 했다. 지수가 공들여 받은 네일아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쉬워 보였던 물레를 돌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집중을 하지 않으면 금세 틀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하아, 따분해.’
지수의 속마음이라도 들리는 걸까 여자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대꾸했다.
“많이 따분하죠? 처음 하시는 분들은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영화나 텔레비전으로는 쉬워 보이죠. 그런데 정신 집중 안 하면 틀 하나 잡는 것도 어려운 게 바로 도자기에요.”
지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손의 감촉을 느끼고 흙이 전해주는 소리와 느낌에 신경을 기울였다. 질척거리지만 부드러운 그 촉감을 손끝 감각으로만 느끼려 했다.
‘아, 살아있는 것 같아.’
지수가 빙긋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흙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자가 말했다. 특별할 것 없다고 그저 프로젝트만 잘하면 그뿐이라고 여겼던 지수에겐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지수는 공방에 들어올 때 보았던 사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투박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지수는 틈틈이 공방에 들렀다. 지수는 가만히 도자에 손을 대보았다.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흙의 기운일까 만든 이의 기운일까, 도자기는 여전히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과 무게감이 좋았다. 옛것이지만 촌스럽거나 싱겁지 않음을. 단순하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화려함이 좋았다.
“지수씨, 뭔가 바뀐 것 같은데. 머리했어?”
회사선배가 지수 옆을 스치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아니요? 딱히 바꾼 건 없는데…….”
지수는 말끝을 흐렸으나 달라진 것이 무언지 내심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제가 공방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고 공방 여자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수씨 제법 실력이 늘었어요. 성격도 많이 차분해진 것 같고.”
“그래요? 호호. 제가 원래 성격 급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웠는데, 여기 다니면서 많이 차분해 진 것 같긴 해요. 흙 만지는 것도 그렇고 물레 돌리는 것도 그렇고. 물레를 돌릴 때면 잡생각이 싹 사라지니까요.”
“선물이에요. 그때 한참 바라보고 있길래.”
여자는 지수에게 작고 아담한 사기그릇 세트였다. 사기그릇을 바라보느라 지수는 고맙다는 말도 잊었다. 손을 대어보았다. 여전히 투박하지만 따뜻했다.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하늘이 닫힌 것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렸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차츰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정전인 것 같았다. 급히 휴대전화의 불빛을 비춰보니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간 것이 아니라 아파트 전체의 문제인 듯 했다. 의도하지 않은 어둠은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리 충전해두었던 휴대전화로 빛을 비추어 보거나 긴급통화를 할뿐, 그마저도 남은 배터리가 15%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아직 8시 40분밖에 되지 않았다. 전기가 언제쯤 공급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무인도에 갇혀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벼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서려는데 문자가 왔다.
“지금 우리 아파트 정전됐어. 요즘에도 가끔씩 정전이 되나봐. 심심해.”
오래전부터 알던 진환의 문자다. 듣자하니 진환이네 집도 정전이 되었나보다. 뉴스에서 전력공급 수요량에 대해 보도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생각했다.
“우리 집도 지금 불 나갔어. 너네 동네랑 우리 동네랑 멀지 않아서 그런가? 심심한데 밖에서 잠깐 볼래? 맥주나 한 잔 하자.”
나도 나가려던 참이었다고 하고 우리 동네 앞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녀석과 나는 원래부터 잘 알던 사이였으므로 어색할 것은 없었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가니 진환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참 공통점이 많다.
“여! 왔어? 갑자기 무슨 정전이래.”
“그러게. 그것도 우리 동네랑 너네 동네랑 같이 정전이라니. 웃기다 크크”
“근데 순간적으로 불이 탁 나가니까 기분이 묘하더라. 내가 너무 불빛에 익숙해졌나 싶기도 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막상 2~3분 지나고 나니까 할 게 없어서 불편하던데? 너도 심심하다고 나온 거잖아.”
“그건 그래. 와. 저기 새로 지어진 아파트 되게 으리으리하다. 그치? 저기 공원은 여기랑은 딴 동네 같지 않냐? 친환경 생태도시라던가? 저거봐, 여기는 정전인데 저기 보이는 불빛 봐. 엄청 화려하다. 빨강에 파랑에.”
“부러워?”
“아니. 뭐 부럽다기보다. 그냥. 얼른 결혼해서 저런 좋은 집에 살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
우리는 비슷한 시기의 각자의 연인과 헤어졌다. 그것도 결혼을 약속한 상대들과. 연인과 헤어진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시기가 비슷해서일까 우리는 서로에게 꽤나 큰 의지를 했었다. 인연은 따로 있을 거라면서. 진환은 당시 여자 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면서 지금 보고 있는 아파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곳에서 서로를 닮은 아이와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진환의 얼굴빛은 불이 꺼진 방처럼 쓸쓸해졌다.
“가자.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어.”
“곧 분수가 올라올 거야. 분수만 보고 가자.”
진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수는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화려한 불빛을 받은 분수는 아름다웠다.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고 분수는 아름답게 솟아올랐다.
아주 잠깐이리라. 솟아오르고 금방 내려오는 분수처럼 혹은 다시 불이 켜지기까지의 정전의 시간처럼.
“이왕에 놀러가는 거 좀 멀리 갈 것이지, 이게 뭐야?”
열 살짜리 동생은 신이 났지만, 올해 중학생이 된 지훈이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나선 가족 나들이인 만큼 해수욕장 같은 떠들썩한 곳으로 갈 것을 예상했는데, 아버지가 서울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여주의 신륵사로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가자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부터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 편을 드는 바람에 지훈이가 다수결에서 밀리고 말았다.
“우와, 형! 저것 좀 봐!”
시무룩한 얼굴로 휴대전화만 내려다보고 있던 지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찻길 옆으로 돌연 바다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냐? 네가 계속 토라져 있어서 잠깐 들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저수지라도 좀 봐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가 아니라 바다처럼 커다란 저수지였다. 지훈이는 아버지가 고갯짓으로 가리키신 곳을 보고 저수지 구경을 하다 말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저게 한 이백 미터 정도 되는 미끄럼틀이야.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고 하지? 한 번 타 보고 갈래?”
“네!”
“다 큰 척 하더니 아직 애는 애구나.”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리셨다. 자세히 보니 저수지만 휑하니 있는 게 아니라, 광장도 있고 체육 시설도 꾸며져 있었다. 지훈이도 동생도 미끄럼틀에 잔뜩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지훈이네 가족은 잠시 저수지변에 차를 대고 쉬다 가기로 했다. 지훈이는 동생과 함께 몇 번이나 미끄럼틀을 탔다.
“아, 이렇게 재밌는 것만 많으면 좋을 텐데.”
다시 길을 떠나게 되자 지훈이가 아쉬운 목소리로 투덜댔다.
“녀석, 가보기도 전에 그러면 안 되지. 거기 가면 염주도 만들 수 있고, 연꽃도 만들 수 있어. 어디 보자. 이 근처에 세종대왕릉도 있고 주록리도 있지. 오늘 하루 절에서 자고, 내일은 요 근처를 좀 돌아다녀볼까?”
“주록리? 그건 그냥 마을 아니야?”
“그냥 마을이라니. 사슴 마을이야.”
사슴 농장이 있는 마을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주록리는 달릴 주 자에 사슴 록 자를 쓰는데, 사슴이 달릴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마을이 생기며 사슴은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주록리는 여전히 가재가 잡힌다고 한다.
“가재뿐이냐? 반딧불도 볼 수 있다, 반딧불도. 게다가 여기 이 금사저수지는 팔뚝만한 잉어가 잡혀서 낚시꾼들이 아주 좋아하는 곳이야. 박물관도 있고 이 근처가 볼거리가 아주 많아서, 나라에서 아예 나들이길 코스를 짜 놨을 정도라니까?”
결혼하시기 전까지 여주에 사셨다는 아버지는 명성황후 생가며 금싸라기 참외, 목아 박물관 등등 여주의 자랑거리들을 잔뜩 늘어놓으셨지만, 지훈이의 머릿속에는 계속 사슴이 맴돌았다. 사슴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마을 이름이 될 정도로 사슴이 많이 살던 곳이 근처에 있다니!
“아빠, 그 주록리에 살았다는 사슴 말이야. 아직도 있을까?”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사슴이 전설 속으로 사라진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사람들을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거라 아직 사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확실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신륵사에 도착해서도 지훈이는 뒷산을 계속 힐끔거렸다. 남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도 멋졌지만, 산 너머로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았다. 아까 아버지가 하신 말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지, 신륵사 뒷산으로 가서 살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