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이었다.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두 시간 사십 분. 부산이라는 도시는 언제 와도 참 묘하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목에는 DSLR 카메라를 메고 있는 내 모습은 자갈치 시장에서 이미 멋쩍게 느껴졌기에, 이번에는 휴대 전화와 카메라를 배낭에 집어넣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산에 올 때마다 들러 보자고 다짐했었는데,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돼지국밥이나 밀면을 먹는 게 목적인 일행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되었던 발걸음이었다. 번화한 거리 너머로 ‘보수동 책방 골목’이라는 기다란 간판과 함께 양 팔로 책을 한 아름 들고 있는 남자의 황동상이 보였다. 자갈치 시장에서 걸어서 십여 분. 드디어, 나는 아날로그의 골목에 들어섰다.
사진을 취미로 삼은 지도 십 년 쯤 된 지금, 나날이 놀라운 성능의 카메라들이 출시되고 있는 가운데서 나는 구형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하나 구입했다. 옆으로 길쭉한 직사각형의 이 폴라로이드는 흑백으로 된 사진을 찍어낸다. 포토샵까지 쓸 필요도 없이 인터넷 사진첩의 보정 버튼 하나만 누르면 사진을 흑백으로 바꿀 수 있는 시대에 쓸데없이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있다고 아내도 친구들도 바보 취급을 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몇 년 전부터 나는 난데없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다. <써니>나 <건축학개론>, <응답하라 1997> 같이 복고를 코드로 한 콘텐츠들이 유행을 타기 시작해서였을까. 갑자기 어렸을 때 살던 동네가 보고 싶어 수십 년 만에 차를 몰아갔더니, 그곳에는 으리으리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아, 그때 내가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칠이 다 벗겨진 초등학교 정문이나 구슬과 딱지, 프라모델까지 팔던 문방구 같은 것들은 이미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월이 지나면 모두 자연스레 변해가기 마련인 것을, 내 추억을 돌려 달라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너무 늦게 과거를 돌아보려 했다는 후회와 함께 아날로그에 대한 한층 더 큰 그리움이 몰려 왔다.
“엄마, 이것 봐요! 영심이!”
낯익은 이름에 뒤를 돌아보니 여대생으로 보이는 아가씨 하나가 만화책 한 권을 가리키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포켓몬스터> 세대인 줄로만 알았더니 우리 세대에나 유행하던 <영심이>도 알고 있나보다.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모녀가 사라진 뒤, 나는 그 여대생이 가리켰던 <영심이>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부모님들 몰래 드나드는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기에 시장골목 안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던 만화 책방. 나는 매일 방과 후면 그곳에서 퀴퀴한 남자 애들과 몰려 앉아 있었다. <마징가 제트>나 <쿤타맨>같은 만화책을 읽으면 나도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어느 새 삼십 여 년 전의 일이 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영심이>는 어느 구석에 숨어 세월을 품고 기다렸던 것일까. 어딜 봐도 빳빳하다고는 해 줄 수 없는 낡은 종이에서 나는 젖은 나무 같은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져왔다. 책방 지하에 있는 북 카페에 앉아 <영심이>를 뒤적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추억이 그리도 반가웠는지, 꿈속에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왔다. 찐 옥수수가 든 바구니를 한 쪽 옆구리에 든 어머니가 땜방 자국이 있는 내 까까머리를 연신 쓰다듬으셨다. 치직거리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뒹굴다가, 나는 또 잠이 든다. 그리고 깨어보니 다시 북 카페 안이었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운수 좋은 날>, <달과 6펜스>와 같은 우리 세대의 필독서들이 새겨진 돌바닥을 밟다 보니 <마징가 제트>가 그려진 빨간 가방이 놓인 집도 나왔다. 하염없이 걷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영심이>를 샀다.
책방 골목을 떠나기 전, 나는 이 향기로운 골목의 사진을 남기려 DSLR을 꺼내다가 고개를 저었다. 선명하고 화려한 것은 이 골목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골목을 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조리개도, 촬영 모드 설정 기능도 없는 그 흑백 폴라로이드였다. 하얀 필름 종이에 풍경이 새겨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삼십 년 전의 어머니와 함께 걷던 바로 그 골목이 환상처럼 새겨지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얼마나 똑똑히 저장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4세 이하의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은 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사진첩을 통해서 유추해 낸 단편적인 조각들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되셨다. 처음에는 그저 노화의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아이를 출산 하면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 자주 깜박깜박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열 두 남매를 출산 하셨으니 그럴 만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께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머지않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리셔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도끼빗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리시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그리고는 심심풀이라면서 고스톱으로 하루 점을 치시기도 하셨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나. 엄마는 염려하는 것 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말 타는 아저씨를 따라 갔을 때 입었던 초록색 멜빵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정신건강에만 열중을 한 탓일까 엄마를 괴롭힌 병은 머릿속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엄마 몸속에 침투한 몹쓸 암덩어리. 엄마는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의사도 엄마의 상태에 대해 급격히 나쁘다 혹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고 일단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보자고 했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의사의 지나친 냉담한 태도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마는 다른 아닌 암이라는 말에 상심이 큰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눈물이 날까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눈물이 나겠지로 생각을 마무리했지만 이렇게 막상 엄마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넘치도록 고였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입원을 위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필수품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당신 마음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대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가까운 갈치호수로 엄마를 모셨다. 엄마는 한동안 호숫가를 바라다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현재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의 생각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드는 두려움일까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 받으면 암세포도 줄어들고 수술하고 나면 싹 다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응?”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생각들만 하라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네, 갑자기.”
“갑자기 할머니는 왜. 자꾸 슬픈 소리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간장게장 집에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어차피 병원 들어가면 밍밍하고 싱거운 밥들만 계속 먹어야 할 텐데 오늘까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들어가서 열심히 치료받자, 응?”
“낙조가 보고 싶은데, 반월호수로 가자. 거기 가서 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가자.”
싫다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굳이 반월호수로 옮겼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더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어쩐지 슬픈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감도는 것 같아 집으로 가자고 하려던 차에 엄마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었다.
“엄마,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기억해줘.”
“엄마 정말 이럴래? 자꾸 왜 슬픈 얘기만 하는 건데?”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도 흐느껴 우셨다. 해가 진지 오래되었지만 엄마와 나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만 되풀이하며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푸른 잎사귀가 넘실거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낯익은 지도와 어깨에는 큰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자동차에서 내렸습니다. 레오라는 이름의 요리사였지요. 레오는 세계를 돌며 수많은 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요리만큼 레오의 입맛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한국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의 전통음식과는 오묘하게 다른 느낌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레오는 얼마 후 미국 열리는 세계적인 요리경연대회에서 당당히 자신이 만들어 낸 한국요리를 선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전 먹었던 한국 음식의 맛이 나지 않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지요. 그렇게 고심만 하던 레오는 직접 한국에서 그 맛과 비결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레오는 이곳저곳을 물어물어 다니며 최고의 재료와 맛을 찾아 떠났습니다. 전국 팔도를 다 돌았지만 이렇다 할 만큼의 특별함을 찾지 못한 레오는 상심하여 돌아가려고 하다 우연히 예전 미국에서 만난 친구 태서의 고향인 정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되어도 화려한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레오는 이곳이라면 최고의 맛과 비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되찾았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술과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한국요리보다 외국 요리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실망한 레오는 터덜터덜 길을 나섰지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지요. 그곳은 온갖 나물들과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시장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가진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레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레오의 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고 시장 한편에서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이 가위를 두들기며 무엇인가를 팔고 또 다른 옆에는 저마다 한 그릇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로 복잡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밥 한 그릇을 쓱 내밀더니 한 아주머니께서 말했습니다.
“노란 머리 총각, 밥은 먹었나? 이거 한 그릇 먹고 가, 배고플 텐데”
아주머니는 레오가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연신 웃는 모습으로 그릇을 내밀었지요.
레오도 낯선 사람과 문화가 어색하였지만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아주머니의 성의를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많은 사람 틈에 앉아 밥 한 숟가락을 떠먹었습니다. 별 볼 일 없다고 느낀 밥맛이 꿀맛처럼 느껴졌습니다. 밥에 들어간 재료를 살펴보니 흰 쌀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 양념을 한 간장 정도 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시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니 아까 그 밥에 들어있던 나물도 보이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전도 보였습니다. 신이 나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각종 산에서 나오는 나물들을 팔았습니다. 나물을 사는 사람들은 큰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고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는 나물을 한 움큼 더 집더니 봉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아까 먹은 밥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곤드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봉지 하나 가득 담아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총각, 밥 맛있게 먹었다니 그것도 고맙고.
집에 가거든 우리나라 그리고 여기 정선 5일장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호호호”
레오가 돈을 내밀자 아주머니께서는 사양하시며 빙그레 웃고는 돈은 다음에 올 때 달라고 하였습니다.
레오는 서툴게 감사함을 전한 뒤 마을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레오는 세계요리경연대회에서 한국인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음식을 선보였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낸 밥상에는 곤드레 나물밥과 메밀부꾸미, 그리고 김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요리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누구의 요리보다 특별했습니다.
지금도 레오의 마음에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웃으며 밥 한 그릇을 건네주던 아주머니의 미소 그리고 정선 5일장의 많은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 말입니다.
탁. 식탁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심하고 매정하다. ‘크음’ 하고 남편이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에는 증발하다 남은 알코올의 잔해가 남아있었고 이내 공기 중에 산산이 부서졌다.
후루룩후루룩 소리만 공중에 맴돌았다.
오늘도 아침엔 청양고추 팍팍 들어간 콩나물국이다. 남편에게 술 좀 그만 마시고 몸 생각 좀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도 마이동풍이다. 이런 잔소리가 오고 가고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반복될 때면 어느 집이나 어느 가정이나 다 비슷한가 보다 생각이 든다. 예전에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킁킁, 이건 아빠의 냄새다. 아빠가 또 약주를 한 잔 하신 모양이다. 엄마가 한결같이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빠는 참 올곧은 사람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빙자하여 모진 소리도 하지만 그건 다 아빠를 위한 거란다.
술이 좋으면 술이랑 함께 살라고 하던가, 술독에 빠진 사람도 당신만은 못할 거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도 아빠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이다.
아빠는 내게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이다. 요즘은 딸 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딸이라면 그저 풀려버린 자물쇠처럼 무장해제인데 우리 아빠는 철저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언제 들었나 가물가물하다. 심지어 다른 애들은 늦은 시간이 되도록 딸이 귀가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전화를 한다는데, 우리 아빠가 내게 전화를 할 때에는 아빠 출근 시간에 차키를 두고 왔을 때 가지고 내려오라는 것이 유일했다.
그런 아빠가 무장해제가 되고 딸 바보가 되는 날. 바로 술을 한잔 하시고 들어오실 때이다.
“연주 자니? 아빠 왔어. 아빠가 왔는데 왜 나와 보지도 않아? 이리 와봐.”
“아휴, 술 냄새. 아빠 또 술이야?”
“아이고, 우리 연주 아직 애기네 애기야. 아빠 수염 까끌까끌 하지?”
“아, 따가워. 그리고 이것 좀 놔. 숨 막힌단 말이야.”
사실은 숨이 막혔던 것이 아니라 아빠의 품이 썩 어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빠는 지금 이런 모습을 다음날 아침 기억하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온 다음날이면 북어와 콩나물을 넣은 해장국을 끓여주신다. 특히 청양고추를 송송 썰고 고춧가루까지 팍팍 쳐 아주 매콤하고 칼칼하게 말이다. 내가 맵다고 고추를 쏙쏙 건져놓으면 아빠는 아빠그릇에 넣으라고 손짓을 한다.
엄마는 밥을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없다. 아빠도 마른기침만 뱉을 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숟가락으로 밥 한 숟갈 뜨고 엄마 눈치 한번. 국 한 숟갈 뜨고 아빠 눈치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밥을 먹으면 엄마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괜히 나에게 호통을 치신다. 밥 먹는데 집중하라고. 치, 밥 먹는데 무슨 집중이람.
내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 반 지영이네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네 아빠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지영이네 엄마는 우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빠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안방 문을 배꼼 들여다보며 엄마가 우시는지 확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매콤하고 칼칼한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 아침상을 차려드린 걸 보면 안다.
내가 지금 그러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빛처럼 어둑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묵례를 했다. 가볍게 바람이 일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선생을 이토록 추억하는 건 선생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있겠지만 생각이 가진 무게와 선생이 늘 지니고 있던 칼의 무게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한 국민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그 기다란 칼 하나에 온 백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목숨이고 이는 한 가정의 기둥의 목숨이기 때문에 늘 고뇌에 차있고 누구보다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감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목숨과 나라가 달려있었기에 태산 같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의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긴 칼로 누구를 벨 것인가. 내가 베고 있는 것이 적장의 목숨일까 혹 자신의 삶이 아닐까 선생은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직분을 숙명처럼 고스란히 받아냈다.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고된 삶 때문에 선생은 지친 몸을 뉘일 때도 차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언제든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도록 갑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두었을 것이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늘 한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짙은 안개가 발아래 깔린 것만큼 진중하여 숨소리 한번 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가진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때. 이곳을 찾아 그분을 생각한다.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을 찾으면 큰 위로를 받곤 한다. 그분의 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날은 이제야 겨우 한낮의 빛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친구의 전화다.
“어디야? 지금 너희 집 근천데 나올래?”
“나 지금 아산이야.”
“너 또 현충사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장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장소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알겠냐.”
“학교에서도 존경하는 위인하면 한결같이 이순신장군이라고 쓰더니... 그래서 언제 올라오는데?”
“지금 가는 길이야.”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내 삶의 무게에 대한 답을 들고 오고 싶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문밖에서 부는 바람소리에 촛대의 불이 미묘하게 흔들렸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현의 방을 비추는 야심한 시각이었지요.
“무릇 양반이라면 돈은 손으로 만지지 말고 쌀값을 직접 물어보아도 안 된다.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는 국부터 먹어서도 아니 된다.”
다리가 저려오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현은 꿋꿋하게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현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현의 집안은 대대로 훌륭한 벼슬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가문의 외아들인 현은 아버지와 가문의 대를 이을 귀한 증손인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침소에 드셨으나 현은 달빛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현은 이러한 양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한 답답함과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이에 대한 위선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현의 집에서 머슴으로 지내는 만복이가 살금살금 대문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야심한 밤 잦은 외출이 의심스럽던 만복이었습니다. 마음도 심란하고 마침 잠도 쉬이 오지 않던 현은 만복이의 뒤를 쫒기 시작하였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향하던 만복이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명 정도의 동네 머슴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하나같이 희한한 모양의 탈을 쓰고는 중얼중얼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이보게 선비, 나는 사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양반이라오.”
“이보게 양반, 나는 오대부 육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선비라오.”
가만히 들어보니 양반과 선비들을 비꼬는 식의 놀이마당 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모양의 탈을 쓰고 있었지요.
마을의 머슴들이 모여 하나같이 양반과 파계승, 선비들을 비웃고 비꼬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충격과 거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만복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현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아까의 탈놀이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만복이는 어김없이 대문으로 향하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였지요. 그 뒤를 조용히 밟던 현은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다랐고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만복이는 자신들이 양반을 희롱하였다는 사실이 들켜 엄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무리들도 자신들이 모시는 양반에 알려질까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현은 뜻밖의 제안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무리에 끼워주시오. 탈을 쓰고 놀이를 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오.”
어리둥절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복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현은 단오하게 무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자신이 양반에 대한 위선과 회의감을 털어놓고 이 무리들에게 양반에 대한 허와 실을 말하며 양반인 자신이 직접 탈놀이를 하여 더욱 사실적인 탈놀이가 될 것이라며 끊임없이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습니다. 끝내 무리는 현을 받아들이게 되고 현의 얼굴에 맞는 양반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매일 무리들과 연습을 하던 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몇 회씩 놀이가 거듭될수록 현의 자신감은 날로 늘어나고 놀이판도 더욱 신명나고 재미있어 상민들 사이에 큰 입소문을 타면서 저잣거리의 큰 행사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만 추며 몇 마디 대사로만 이루어졌던 탈놀이가 악기들이 늘어나 더욱 신명나고 대사들은 더욱 신랄해지며 구경꾼들도 함께 참여하는 큰 놀이마당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점점 커지면서 양반들의 귀에도 하나 둘씩 탈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반들은 치욕스럽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나둘 씩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하였습니다. 이로써 양반들은 서로 쉬쉬하며 탈놀이를 보기위해 저잣거리로 나가는 양반들도 생겨나게 되고, 현은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다른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탈놀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게 되고 지금도 양반탈을 쓴 현은 신명나는 놀음 한 판을 벌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소복소복 눈이 내리던 날. 인애는 코끝이 빨개지도록 민준을 기다렸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인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장갑을 낀 손은 따뜻해질 줄 몰랐고 몸도 점점 으슬으슬 떨렸다. 민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
인애와 민준은 같은 학교 선후배로 만났다. 인애는 긴 생머리에 항상 음악교재를 들고 다니며 뭇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곤 했다. 민준도 그 중 하나였다. 인애는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피아노 연습이 없는 날이면 동아리 활동으로 학교 방송실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학생들은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애에 대한 연애편지를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 인애가 민준을 만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법학과 학생이었던 민준은 인사관 건물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음료수 캔 하나를 뽑아 마시려 오백 원짜리 동전을 자판기 동전투입구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동전을 집어삼킨 자판기가 고장이었는지 꿈쩍도 안하는 것이었다. 민준은 자판기를 손으로 쿵쿵 쳐보다가 그래도 아무런 낌새가 없자 발로 쾅쾅 걷어차 보았다. 그때였다.
“저기, 지금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자판기를 그렇게 걷어찬다고 음료수가 나오겠어요? 돈이 없으면 마시지를 말던가.”
민준의 행동을 본 인애의 가시 박힌 말이었다. 민준은 순간 당황하였고 부끄러운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법학개론 책을 슬쩍 뒤로 숨겼다.
“저기요, 그게 아니라 돈을 넣었는데 이 자판기가 먹어서 잠깐 쳐본 거거든요?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참견이에요?”
“뭐라고요? 오지랖이요? 자판기가 돈을 먹었으면 연락을 하면 될 것을 그것도 법을 공부한다는 학생이 그래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인애가 민준의 책을 본 모양이었다. 민준은 얼굴이 홍당무보다 더욱 벌개져서 마른기침을 한 번 내뱉더니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살면서 특별히 죄를 짓는다거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낯 뜨겁고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인애 앞에서라니. 민준은 책으로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민준은 오해를 풀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인애에 대한 정면승부인지 방송실에 사연을 보내기로 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전 자판기에 대한 화풀이도 아니었고 그저 동전을 집어삼킨 자판기에 대한 작은 하소연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서요. 신청곡은 없고 이 사연 들으면 정문 앞으로 4시까지 나와 줄래요?’
일을 저지르긴 했으나 정말로 인애가 나와 줄지 걱정이었다. 드디어 4시. 정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인애가 나왔다. 둘은 그렇게 만났다.
*
조금 더 있다가는 추위에 인애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뒤를 돌아서 가려는데 민준의 친구가 인애를 불러 세웠다. 지금까지 민준을 기다린 거냐며 민준이 오늘 열병이 나 학교에 못나왔다는 것이었다. 그저 서프라이즈로 일부러 전화기도 꺼놓고 기다린 것이었는데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전화를 많이 했을까 하고 전화기 전원을 켜보니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인애는 곧바로 민준에게로 달려갔다.
민준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보였다. 그 와중에도 코끝이 빨개진 인애에게 얼마나 기다린 거냐며 감기걸린것 아니냐고 물었다. 인애는 바보같이 아픈 사람이 누굴 걱정 하냐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닥 달그닥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뒤 죽을 끓여왔다.
“그냥 편의점 죽 하나 사다주지 뭐 하러 이렇게 만들어. 그런데 이건 무슨 죽이야?”
“게살죽! 대게 살 발라서 이렇게 죽에 비벼먹으면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니까.”
“게살죽? 맛있겠다. 네가 살 다 바른 거야?”
“그럼! 나 아팠을 때 우리엄마가 항상 영덕대게 푹 삶아서 다릿살이랑 내장이장 참기름 한 방울 넣어서 쓱쓱 비벼줬거든. 그러면 한 그릇 뚝딱이었어. 그러니까 한 번 먹어봐.”
“맛있다. 정말, 힘이 불끈 솟는데? 고마워.”
다음날 방송실로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인애는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들고 정문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달려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엄마한테는 짭조름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땀 냄새도 아니고 엄마 한테서만 풍기는 엄마냄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슈퍼맘이나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선풍적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우먼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우리 엄마가 슈퍼맘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슈퍼맘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슈퍼맘의 길에 접어들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등 떠밀려 슈퍼맘이 되어야했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려고 엄마는 참 열심히 일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개업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의 조금 큰 한식당에서 주방 설거지를 하고 홀 서빙 일부터 시작했다. 식당이 문을 여는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식당이 문을 닫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트고 거칠었다. 사실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식당에 가신 후라 아침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밤에는 엄마를 기다리다 먼저 잠든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식당에서 일을 한 엄마는 이듬해 봄에 작은 한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음식판매뿐 아니라 반찬을 함께 팔기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요리솜씨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있어서 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소금을 가장 깐깐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메인 요리와 함께 나가는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밑반찬이 깔끔하고 맛있다며 종종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계속 일을 고집하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하던 일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빨리 늙는 거라고 했다. 하긴 지금까지 엄마의 삶에는 조금의 쉼도 없었다. 늘 바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이라 여유라는 쉼이 엄마에겐 어떤 것보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봐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가 짠돌이 아지매 아니랄까봐 자식농사 풍년인데 뭣하러 지금까지 고생이냐고 했고, 엄마는 “짠돌이 어디 가나요. 그러지 말고 계모임 같은 거 있으면 다른 식당 가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와요”하며 웃음만 지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짠돌이 아지매라 불렀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 짠돌이라는 별명에서 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용돈을 참 적게 주셨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아껴야만 겨우 학교 준비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내 별명은 짠돌이였다. 물론 지금도 짠돌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만큼 벌이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엄마처럼 짠돌이 아지매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한 걸 보니 반찬으로 나갈 배추겉절이와 오이소박이, 각종 나물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는 날이면 엄마를 도와 반찬을 만들며 식당일을 돕는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항상 ‘소금’의 중요성을 연설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큼 음식의 풍미를 돋우어주는 소금의 선택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신안에서도 가장 좋은 천일염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런 좋은 소금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했지만 엄마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간 하나에 발길이 이어지고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칭찬과 쓴 소리가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 질 낮은 소금을 쓰면 음식이 텁텁하고 쓴 맛이 감돌며 질 좋은 천일염을 쓰면 깔끔하고 풍미 있는 깊은 맛을 낸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은 소금만큼이나 짭짤했다. 질 좋은 소금을 써서 일까 사람들은 엄마의 음식솜씨를 칭찬했고 ‘짠돌이 아지매’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엄마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엄마 특유의 짙은 냄새가 났다. 엄마에게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도 질 좋은 천일염처럼 기분 좋은 엄마 고유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