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십 분만 일찍 깨워도 하루 종일 짜증을 내는 나이지만, 오늘만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분주히 움직였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불자이시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 년 중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만큼은 내게도 특별한 날이다. 평소에는 집 근처에 있는 절에 다니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파일에만 이른 아침부터 시외버스를 타고 범어사에 가신다. 그리고 나는 몇 년 째 범어사 가는 길에 동행하고 있다.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니, 오래되었다면 오래 된 이야기다.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도시락을 싸 들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그 곳에서 꿈속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마다 보랏빛 포도송이가 매달린 신비한 나라에 가는 꿈을 종종 꾸었다. 산자락 한 귀퉁이로는 맑은 샘물이 솟고, 그 안에는 자잘한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큼직큼직한 바위들 사이로, 거대한 나팔꽃처럼 굵직한 나무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그 모습에 반하여, 하루는 꿈에서 깬 뒤에 그 숲의 모습을 남몰래 크레파스로 그려 두었었다.
몇 년 뒤, 어머니께서 그 스케치북을 발견하시며 이 숲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을 보시고는, 어머니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요 녀석, 여기 갔던 걸 기억하고 있네? 아주 코흘리개일 때 데리고 갔었는데.”
그랬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갔었던 범어사의 등나무 숲이 꿈속에 나왔던 것이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연보랏빛 등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포도나무 숲이라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었다고 한다.
“정말 괜찮겠니? 이따가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가지 그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지만,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내가,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범어사로 올려 보내고,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등나무 숲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안개가 짙었다. 등나무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하여, 이곳을 등운곡(藤雲谷)이라고도 부른다 하였는데 안개와 등나무 꽃이 한 군데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신비로웠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오래 걷지를 못하는 탓에 잠시 등나무 숲 한 복판에 주저앉았다.
“등나무는 지가 살려고 소나무 같이 좋은 나무를 감아 올라가서 다 죽이삔다 아니가.”
구불구불한 등나무 사이로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쭉 뻗어 있는 모습을 보자, 작년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이 동네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 날 집에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숨을 죽여 울었다.
하나 뿐인 아들, 하나 뿐인 손자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내 다리를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지팡이를 짚고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검정고시라도 준비했으면 되었을 텐데,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했다. 결국 나는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백수가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저 멀리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단숨에 나를 찾아내어 달려오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또 소나무 생각을 했다. 넘어지지는 않았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익살스럽게 내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어 보였다.
“이 녀석이 있잖아요.”
할머니가 웃으며 끼어드셨다.
“녀석, 그 지팡이도 요 등나무로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누? 지팡이 중에서는 등나무 지팡이가 최고지. 옛날에 신선들도 다 등나무 지팡이 짚고 다녔다잖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소나무를 죽이는 등나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짚고 일어설 수 있는 등나무가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에는 포도송이처럼 보였던 등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해가 지면 범어사 안에는 등불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저도 꽃을 피울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