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급히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런 자동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머리카락이 늘어져 더 초라해보였다. 여자가 차에 올라 탈 때 차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무언가 이야기 할 때 남자가 짧게 ‘하이’라고 하는 것 보니 일본인 같았다.
달빛이 힘을 잃어 어스름했다. 낡았지만 붉은 빛이 선명한 벽돌 건물 앞에 여자는 멈추어 섰다. 여자는 차 안에서 머리를 빗었는지 아까보단 단정해보였다.
차마 붉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 밖만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은 유난히 볕이 따가웠다. 선글라스나 모자 없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도록 쾌청한 하늘은 뜨거운 여름을 실감나게 했다. 어제 본 검은색 자동차가 다시금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여자 혼자가 아니라 웬 꼬마아이와 함께였다. 아마 여자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어제보다 단정한 차림이었다. 검정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붉은 벽돌 건물로 들어섰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타케이. 잘 봐. 오늘을 잘 기억해둬.”
여자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이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경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붙어있는 방이었다.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방을 나오고 나서는 인형으로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은 곳을 들어갔다. 실제와 가까운 비명소리와 인형의 모습에 타케이는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무서웠는지 여자의 뒤로 숨으며 나가고 싶어 했다.
“타케이. 무섭니? 하지만 기억해야해. 잊어버리면 안 돼.”
무서워하는 타케이의 손을 잡고 건물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날이 쾌청해서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서는 이들과 같은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엄숙함을 표했다.
타케이는 여전히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곳을 응시하더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타케이. 유관순 열사 알지? 이분이 여기에서 돌아가셨어.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야.”
타케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아마 감옥이라는 곳은 죄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아이와 함께 검은 차에 올라탔다. 조용한 발걸음이라 다녀간 흔적도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차안에서 여자를 모시고 가는 남자가 물었다.
“이곳을 이렇게 자주 찾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타케이까지 데리고.”
“당연히 와보아야 하는 곳이니까요.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래도…….”
“유타, 여기에 계신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들의 뼈아픈 외마디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잇몸이 문드러져 이가 으스러져도 소리 한번 힘껏 지르지도 못한 분들이라고요.
지나간 시간이고 흘러버린 역사라고 해서 모른 척 눈을 돌리는 건 비겁해요. 좁고 어두운 무서운 곳에서 두꺼운 철제 창이 열리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의 핏물 섞인 소리를 들어야 해요.”
여자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낡은 지갑 속 흑백사진을 말없이 꺼내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