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걸려온 전화 한 통.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걸려온 전화이다. 사실 그녀가 학교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초등학교 동창생 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거지를 하던 도중에 급히 받은 전화라 대충 받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길어진 통화에 고무장갑까지 벗고 진지하게 전화를 받았다.
1993년 폐교가 된 생둔분교. 가물가물한 이름을 말하는 동창생이지만 일단 반갑게 통화를 했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 정도는 더 높은 톤의 목소리에 동창생과 통화를 하는지 콜 상담원직원과 통화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걸려온 전화의 요지는 이번 동창회는 특별하게 분교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참석하라는 것. 권유가 아닌 통보다.
홍천에서 서울로 떠나온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과의 분교캠핑이라니. 다 늙어서 무슨 캠핑이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홍천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오지마을. 그동안 궁금하긴 했다. 매캐한 연기와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쉼 없이 달려온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이곳이 궁금하긴 했다. 학교도 친구들도 마음속으로 안녕을 전해야만 했던 추억들이었다.
미숙이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기는 척 동창회에 나가기로 했다. 약속장소 도착 5분 전 친구들이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초등학교 친구들이라 얼굴이 많이 변했을 텐데. 똑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으나 어쩐지 늙는다는 것이 서럽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동창회 소식을 알리던 미숙이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전화 속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어머 반갑다. 얘, 얘는 어떻게 늙지를 않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엉?”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버스 안에 앉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졸업을 하기 전 떠난 수학여행이 생각났다. 많지 않은 전교생이라 소풍 정도로 보였겠지만 그 나름의 추억이 있었다.
도심의 때가 묻지 않은 마을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점심도 그때의 추억 그대로 김밥에 주황색이 진한 환타 병까지 준비되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함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어색함이 없는 친구들. 맨 앞자리에 앉던 키 작은 친구, 뺑뺑이 안경에 반에서 일 등만 하던 반장 모두 그대로이다.
남자들은 물고기를 잡겠다며 바지를 걷어 올리고 족대를 들고 한껏 들뜬 모습으로 계곡으로 향했고 여자들은 금방 쪄낸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일찍 시집갔던 친구는 벌써 손주를 보았고 여태껏 일만 하다 결혼을 못 한 친구도 있었다. 삶이 다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열심히 살았나 보다.
언젠가 경비아저씨와 악을 싸우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중년의 여성을 본 적이 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중년의 여성은 쉬지 않고 말을 했고 그 모습이 적잖이 꼴 보기 싫었다. 그 이후로 중년의 여성이 쉼 없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 앞에서 쉼 없이 지난날을 곱씹고 있다. 누가 보면 꼴 보기 싫을 수도 있으나 상관하지 않는다.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는 미숙이가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거봐, 오길 잘했지?”
빙그레 웃었다. 오길 잘했다. 2013년이 아닌 1993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으니까.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으면 열대야라며 손부채질을 끊임없이 해댔겠지만 이곳의 공기는 청명했다. 달도 밝고 별도 쏟아질 듯이 빛났다.
어느 샌가 친구들은 모두 별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모일 수 있을까. 벌써 헤어짐이 아쉬운 걸까. 그리움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의 행복과 기억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밤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차가운지 따뜻한지 모를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마음에 머문다.